한국미용의 역사(1)

2022. 10. 27. 04:40미용학

태초에 인간이 생기고,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할 때부터 꾸밈은 우리와 함께 해왔다. 

우두머리로서 인정받기 위해 또는 이성에게 구애하기 위해,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유로서 인간의 삶과 함께 해왔다. 

이것을 현대에서는 '미용'이라 지칭하며 세분화 되었다. 

미용의 종류에는 피부미용, 네일, 헤어(이발), 메이크업이 있다. 

  공중위생관리법 제2조 5항에 의하면 ‘미용업이란 손님의 얼굴, 머리, 피부 등에 손질하여 손님의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영업’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또한 미용업소란 미용사가 미용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춘 사업장을 의미하며, 미용 행위 다시 말해 미용 업무에 대해서는 공중위생법 시행규칙 제28조에 ‘미용사는 퍼머넌트, 머리카락 자르기, 머리카락 모양내기, 두피 손질, 머리카락 염색, 머리 감기, 손톱 손질 및 화장, 피부미용(의료 기구나 의약품을 사용하지 아니하는 순수한 피부미용을 의미), 얼굴 손질 및 화장을 그 업무로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미용인은 고객의 모발, 피부, 건강 상태를 직시하고 있어야 하며, 그에 대한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하므로 기본적인 미적 감각과 센스가 요구된다. 결론적으로는 고객의 요구에 따라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여 감동을 줄 수 있는 결과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미용은 청결하고 흰 피부를 선호하였으며 신분에 따라 머리 형태와 화장법에 차이가 있었으며 단정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을 치장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놓도록 백성에게 지시한 것으로 보아 상투 형태로 변해갔다고 한다. 곰과 호랑이의 건국 신화를 바탕으로 미루어보아 희고 건강한 피부를 위해 쑥과 마늘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만주 지방에서는 라드(돼지기름)를 사용하여 동상을 예방하였으며, 말갈인은 오줌으로 세수하여 흰 피부를 가꿨다고 한다. 또한 유물로 뼈 비녀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쪽 찐 머리가 행해짐을 알 수 있다.

이후 삼국시대와 신라시대로 들어 미용에 대한 부분이 더욱 발전하고 세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은 국가로서, 불교 의식에 따른 목욕과 향이 사용되었으며 머리의 형태로 귀천의 차이를 나타냈다.  통일왕조였던 당나라의 역사 문서인 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여성들은 신분에 따라 가발을 사용하여 다양한 머리 형태로 신분을 표현, 과시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무녀와 악공이 곤지(볼 화장)를 행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또한 쌍영총 벽화 등 출토된 벽화에서 화장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백제 미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일본의 화한 삼도 재회에서 백제로부터 화장품 제조 기술과 화장법을 배웠다는 기록을 볼 수 있으며, 중국 문헌에서는 백제인의 화장은 '얼굴에는 분을 바르지만, 입술에는 연지를 바르지 않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북방의 유목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민 집단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나라로 마한의 전통을 계승하여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찐 머리와 머리를 둘로 갈라 상투를 두 개로 틀어 올린 쌍상투 머리,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리는 댕기 머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영혼이 머문다' 즉, 영육일치 사상의 영향으로 남녀 모두 몸을 청결하게 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가체를 사용한 장발 기술이 우수했으며, 머리를 가꾸는 것에 높은 관심이 발달하여 머릿기름을 제조하였다. 또한 귀걸이, 가락지 등 장신구를 사용하여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군인, 관리를 양성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던 화랑은 아름다운 청년을 모집하여 내면의 수련뿐 아니라 외면을 가꾸는 것 역시 중요하게 보았으므로 단순한 수련 단체를 넘어 현대로 치면 나라를 대표하는 홍보대사에 해당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불교의 영향으로 목욕이 대중화되었으며 향유가 발달하였다.
  통일신라시대로 넘어와, 삼국의 문화를 융합하고 신라의 전통적 문화를 계승하여 머리모양과 장신구들이 다양해지고 매우 화려해졌다. 또한 당나라 문화를 중심으로 국제 문화 조류에 직접 참가하여 더욱 세련된 문화로 발전해나갔다. 당나라에서 수입해온 빗, 비녀 등 여러 가지 머리 장신구를 사용하였고,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남성들이 단발머리를 하기도 하였으며 여성들은 가발을 사용하는 얹은머리를 즐겨하였다. 이는 훗날 고려와 조선의 가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 시대에는 통일신라의 문화를 전승하였으며 신분 및 나이에 따라 달리 치장하였다. 여성들은 댕기 머리와 가체를 사용한 머리를 즐겨하였으며 남성의 경우 머리를 틀어 올려 한 곳으로 모아놓는 상투의 형태를 주로 하였으나, 원나라의 섭정 때에는 변발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는 화장이 신분과 사회적 역할에 따라 나뉘는 등 이원화가 시작되어 기생들은 분대 화장이라 불리는 진한 화장을 여염집 부인들은 비 분대 화장을 하였다. 화장품을 보관하는 용기가 발전되어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제작되어 견고해졌으며 향수병, 분합 등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고려 말에는 숯, 재, 옻나무 등 검은 빛이 나는 가루들로 백모를 커버하기도 하였다.

 고려와 다르게 조선은 유교 사상을 받아들여 남존여비의 사상으로 인해 고려 시대에 비해 검소하고 간략하였으나 명나라의 영향으로 점점 가체가 높아지고 화려해졌다. 이로 인해 영조 32년 가체를 무겁게 쓴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목이 부러져 사망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가체 금지령을 내려 족두리를 쓴 형태의 쪽 찐 머리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간소한 형태의 족두리였으나 신분과 재산에 따라 족두리는 자개, 가죽 등을 덧대어 더욱 화려해졌다. 그리고 화장의 이원화가 뚜렷해지고 화장이 세분되었으며, 궁중 여인들의 화장과 제품을 생산하는 전문 기관인 보염서도 생겨났다. 규합총서(순조 9년) 부녀자들의 생활지침서에는 여인들이 지녀야 할 덕목, 요리법, 염색법, 화장법 등을 수록한 목판본이 편찬되었으며 화장품 제조 방법 및 화장 방법이 수록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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