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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공주의 아름다운 일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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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뷰티, 일상을 기록하는 오로라의 블로그입니다&amp;hearts;
방문을 환영해요! 좋은 하루  되시고, 꽃길만 걸어요&amp;hearts;</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Wed, 20 May 2026 22:23:3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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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오로라공주</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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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공주의 아름다운 일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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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 미용의 역사(4)</title>
      <link>https://monde-beauty.tistory.com/6</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전쟁 직후였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에는 이전보다 더욱더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망설임이 없어졌다. 1970년대는 샤키컷과 상고머리 커트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1970년대는 달러와 오일쇼크,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으며, 사회적인 불안정함과 동시에 재정적자가 전 세계를 강타하였다. 소비가 미덕이었던 시대에서 절약이 미덕인 시대로 전환되었으며, 전문적인 흑인 모델도 등장하였다. &lt;br&gt;주요 시대사조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여성운동의 확산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의식주를 간소화 시켰으며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이었으며, 조깅과 자연주의 식이요법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여성운동의 확산으로 남성들의 전문 직종이었던 업종에 여성들의 종사가 증가하였고 활동하기 편한 옷들이 유행하였다. 반대로 펑크, 히피라는 저속하고 과격한 풍조를 낳기도 하였다. 전통에 구속받지 않는 창조성과 창의성을 모토로 삼았으며, 젊은 세대들에게 급속도로 확산하여 하나의 문화를 만들었다. 이 문화는 70년대 후반에 스트리트 패션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에는 60년대에 유행했던 미니스커트와 보브컷 스타일이 네이프 부분을 길게 길러 깃털처럼 가볍게 질감을 처리한 샤키커트가 유행하였다. 이전처럼 잘 꾸미고, 세팅된 스타일보다는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듯한 웨이브 스타일이나 퍼머넌트가 유행하였고, 콘 로우라는 흑인 머리 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했다. 70년대 중반에는 영화 '미녀 삼총사'의 파라 포셋의 자연스러운 헤어 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펑크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에게서 분홍색, 민트, 밝은 초록색 같은 자극적이고 화려한 색감의 염색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화려한 스타일의 염색은 일반인들에게도 유행이 되었고 이때 모발을 보호할 수 있는 트리트먼트, 컨디셔너 같은 모발 단백질 보호제 등이 등장하였다. &lt;br&gt;짧은 커트 머리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연령층에서 유행하였다. 파라 포셋의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듯한 가벼운 질감의 흩날리는듯한 중단발 길이의 블로우 드라이가 큰 인기를 누렸다. &lt;br&gt;한 편으로는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침체기에 들어서면서 반항적인 펑크라는 하위문화가 생겨났다. 펑크 문화는 히피 문화의 반작용으로써 세계적으로 어렵고, 우울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싶어 하는 양상을 보이며 히피문화보다 더욱 더 과격하고 저항적인 모습을 보였다. 펑크족들은 과격하고 거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자신들의 우울&lt;br&gt;감과 좌절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했으며 대중들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다. 신디 로퍼라는 가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중들의 분대 화장에 영향을 미쳤다. &lt;br&gt;1980년대 또한 지속해서 세계적인 경제 침체가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들은 우리의 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놨으며 여성들의 경제활동과 사회적지위, 활동 등을 증가시켰다. 이에 따라 경제적인 소득 증가, 생활 양식의 수준을 큰 폭으로 향상했으며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제품과 생활의 면에서 다양함과 질적 향상을 요구했으며 여가생활의 부분에서 중요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매체의 발달로 인해 인종의 다양성과 문화, 환경 등의 관심 또한 높아졌으며 흑인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지며 나오미 캠벨, 마이클 잭슨과 같은 문화, 예술이 등장하였다. &lt;br&gt;작업복으로만 인식되던 청바지가 보편화됨에 따라 캐주얼 의류가 보편화되었으며, 실용적인 의복의 패션화가 진행되었다. 이 시기엔 안정적인 생활 수준 향상으로 다양하고 개성적인 헤어스타일이 나타났고 클리퍼와 레자를 사용한 펑키한 중성적인 헤어스타일이 나타났고, 미용 도구의 발전으로 자연스럽고 풍성한 굵은 웨이브와 긴 생머리가 유행하였다. 1982년은 전 세계 미용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하였고 커트와 퍼머넌트 웨이브가 다양해짐에 따라 헤어스타일의 개성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시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컬과 웨이브에 싫증을 느낀 여성들 사이에서 스트레이트 파마와 단발 보브컷의 흩날리는듯한 웨이브처럼 손질하기 편한 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80년대 후반에는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탈색을 통한 대담하고 화려한 컬러링이 성행하였고, 헤어무스나 젤 같은 제품이 보편화되어 앞머리를 높게 세우기도 하였다. 일부 연예인들을 우상화로 내세우면서 이러한 문화 풍조를 10대들의 유행을 부추기기도 하였다. 1990년대까지 다양한 컬러가 보편화되어 더 다양하고 화려한 염색과 탈색이 유행했고, 후반에는 매직 스트레이트 퍼머와 퍼머넌트 익스텐션이 유행하였다. &lt;br&gt;1980년대에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메이크업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전까지는 진한 눈썹과 이목구비만 살려주는 스타일의 메이크업에서 컬러텔레비전으로 보급되면서 메탈릭한 파란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조 메이크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눈과 입술 모두를 강조하는 메이크업이 유행하면서, 붉고 진한 레드립뿐만 아니라 분홍, 주황빛의 진하고 다양한 립컬러들이 등장하였다. 파티를 위해 펄이 들어간 골드, 붉은색의 제품을 눈이나 볼에 발라 화려하게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의 색조 메이크업은 다양하게 발전하는 시기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런 80~90년대의 미용을 참고하여 콘셉트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을 추구하기도 하며 현재는 이런 다양한 색조 메이크업을 참고하여 복고풍 또는 뉴트로(New+Retro의 합성어) 컨셉의 메이크업과 패션, 헤어스타일링이 성행하고 있다. &lt;br&gt;한국의 미용산업은 이때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lt;/p&gt;</description>
      <category>미용학</category>
      <category>뉴트로</category>
      <category>미용</category>
      <category>미용산업</category>
      <category>미용역사</category>
      <category>미용자격증</category>
      <category>색조메이크업</category>
      <category>전문직</category>
      <category>특성화</category>
      <category>한국미용</category>
      <category>한국미용발전</category>
      <author>오로라공주</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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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monde-beauty.tistory.com/6#entry6comment</comments>
      <pubDate>Wed, 2 Nov 2022 14:16:4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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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 미용의 역사(3)</title>
      <link>https://monde-beauty.tistory.com/5</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일제강점기부터 개화기,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 미용의 역사에 관한 전반적인 글을 앞서 써보았다.&lt;br&gt;이제 격동의 60년대를 맞이하였고, 1960년대의 한국은 한국전쟁이 막 끝나 아무것도 없는 폐허였으며 전 세계 최빈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으로 급속한 경제개발이 이루어졌고, TV 방송국 개국과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로 인해 다양하고 복잡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이 증가함에 따라 여성 전화교환원, 여경, 버스 안내원 등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TV 방송국 KBS가 개국했으며 여성 트리오의 데뷔와 한국 최초의 미스코리아와 패션쇼가 열렸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영화를 필두로 한국의 영화가 개봉되었다. 매체의 발달로 인해 일명 바가지머리와 상고 단발머리가 유행했고, 트위기 스타일의 메이크업과 패션이 유행했다.&lt;br&gt;영국 출신 패션모델인 트위기는 본명 레슬리 혼비(Lesley Hornby)이다. 데뷔 전에는 봉제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고, 미용실에서 손님들의 샴푸를 담당하다가 1967년 「보그(VOGUE)」의 표지로 데뷔하였다. 당시 모델들은 대부분 몸매가 풍만하였으나 레슬리는 40kg의 마른 몸매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트위기라는 예명 또한 몸매가 마른 가지처럼 앙상하다 하여 예명이 트위기로 되었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고 가느다란 소년과 같은 몸매와 천진난만한 외모 때문에 미니스커트가 가장 잘 어울리는 모델로 붐을 일으켰다. 독특한 아이홀 메이크업, 진한 속눈썹과 보브컷 단발머리 등 색조 메이크업의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개성적인 포즈는 지금도 모델들의 교과서가 될 정도로 알려졌고, 비달 사순의 보브 헤어, 히프 본식의 미니스커트, 체인벨트, 무늬가 들어간 스타킹 등의 스타일이 트위기 룩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였다. 4년 정도의 기간 동안 왕성한 모델 활동을 하다가 결혼하면서 단순한 옷걸이가 되기 싫다며 모델계를 떠났고, 이와 함께 미니스커트 유행도 쇠퇴하였다. 이후 1972년에 영화 「보이 프렌드(The Boy Friend )」의 주인공 폴리 브라운(Polly Browne)의 역할을 맡아 컴백하기도. 타이라 뱅크스(Tyra Banks)가 진행하는 모델 서바이벌 프로그램 도전 슈퍼모델(America's Next Top Model) 시리즈에 심사위원으로도 등장해 많은 팬에게 여전한 모습을 선보였다. 현재는 가수, 사업가, 방송인 등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lt;br&gt;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과 동시에 한국의 산업화가 진행되던 때로 여성의 경제활동도 증가하였고 경제 개발 5개년, 경부고속도로 개설, 조선소 및 제철소 건립으로 급격한 경제개발이 이루어지고 사회, 경제, 문화 등의 방면으로도 복잡한 변화의 양상을 보였다. 따라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하면서 가정 내에서 가사와 자녀 양육 문제 등에만 국한되던 전통사회의 생활 관습에 얽매였던 여성의 역할이 사회생활과 가정 활동을 겸하는 형태로 변천되어 갔다. TV 방송국이 시작되었고 서양 문화 수용, 새로운 대중매체의 등장, '월간 주부'와 '여원' 같은 여성지의 창간 등으로 생활정보력을 갖추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여성들이 유행정보를 접하게 되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선진국과의 문화적 교류도 풍부해짐에 따라 FW,SS시즌 컬렉션의 수입이 활발해짐에 따라 패션에 서양풍의 화장과 드레스 업이 유행하였다. 대표적으로는 브리지트 바르도의 푸른색 섀도였다. 이때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의 영향으로 밀수 화장품이 국내의 화장품을 주도하였으나,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풍토에 따라 국산 화장품이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며 콜드크림이라는 제품이 등장하여 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았다. 이전까지는 희고 고운 얼굴을 추구하며 만들었던 새하얀 분보다는 자연스럽고 윤기 있는 피부 색깔로 유행이 변화하였다. 하지만 눈과 입술은 서양의 것을 모방한 것이 추세였으며 붉은 립스틱과 깊은 아이홀 메이크업, 핑크빛의 치크를 표현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대표적으로는 브리지트 바르도의 푸른색 섀도와 진한 스모키 메이크업이 유행하였다. 당대 여성들의 워너비였던 김지미와 남정임을 따라 아이라인을 그렸고 속눈썹을 바짝 올렸었으며 한편 서양인에 맞췄던 핑크톤의 피부표현보다는 옐로우 톤(오클톤)의 피부표현으로 바뀌었던 것을 보면 한국인의 피부와 얼굴에 따라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lt;br&gt;외국영화 수입으로 인해 오드리 헵번의 푸들 머리 스타일과 진한 눈썹, 붉은 립스틱, 길게 뺀 아이라인이 유행하였으며 60년대에는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었던 윤복희는 민족 반역자로 매스컴을 오르내리며 엄청난 질타와 계란 세례를 받았지만 젊음의 상징이 되었었다. &lt;br&gt;1960년 초에는 앞머리와 양옆에 볼륨을 준 헤어스타일이 유행하였으며, 이는 바가지 머리라고 불렸다. 1960년대 중반엔 업스타일과 함께 보브컷이 주를 이뤘으며 가발의 착용이 보편화되어 헤어 스타일링을 개성있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68년에 들어서는 가수 윤복희씨에 의해 보브컷 스타일이 소개되었다. 짧은 머리로 간편하게 손질이 가능하였고 이는 학구파 신여성과 경제 활동하는 여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한 양장과 한복을 혼용하여 착용했으며 올림머리를 주로 함으로써 고데기나 드라이를 사용했으며 이는 현대 업스타일, 드라이 스타일링의 시초가 되었다.&lt;/p&gt;</description>
      <category>미용학</category>
      <author>오로라공주</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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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30 Oct 2022 18:47:0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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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 미용의 역사(2)</title>
      <link>https://monde-beauty.tistory.com/4</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근대와&amp;nbsp;현대&amp;nbsp;미용의&amp;nbsp;역사는&amp;nbsp;근대&amp;nbsp;개화기에&amp;nbsp;들어온&amp;nbsp;미용법이&amp;nbsp;주로&amp;nbsp;큰&amp;nbsp;영향을&amp;nbsp;미치고&amp;nbsp;있다. &lt;br /&gt;&lt;br /&gt;조선&amp;nbsp;근대에는&amp;nbsp;흥선대원군의&amp;nbsp;쇄국&amp;nbsp;정치에&amp;nbsp;실패&amp;nbsp;후,&amp;nbsp;일본을&amp;nbsp;통해&amp;nbsp;서양의&amp;nbsp;문물과&amp;nbsp;사상이&amp;nbsp;인입됐으며&amp;nbsp;광복&amp;nbsp;이후까지의&amp;nbsp;미용에도&amp;nbsp;큰&amp;nbsp;영향을&amp;nbsp;미치게&amp;nbsp;된다. &lt;br /&gt;&lt;br /&gt;시대적&amp;nbsp;사건으로는&amp;nbsp;1895년의&amp;nbsp;단발령은&amp;nbsp;우리나라의&amp;nbsp;머리형에&amp;nbsp;일대&amp;nbsp;혁신을&amp;nbsp;가져왔다.&amp;nbsp;또한&amp;nbsp;서구&amp;nbsp;문화&amp;nbsp;유입과&amp;nbsp;함께&amp;nbsp;일본의&amp;nbsp;문호가&amp;nbsp;개방되고&amp;nbsp;국외&amp;nbsp;유학생과&amp;nbsp;신여성들에&amp;nbsp;의해서&amp;nbsp;한국의&amp;nbsp;근대,&amp;nbsp;개화기&amp;nbsp;시대&amp;nbsp;미용은&amp;nbsp;급진적으로&amp;nbsp;발전하게&amp;nbsp;된다. &lt;br /&gt;&lt;br /&gt;근대 개화기는 1876년부터 광복 전으로 나뉜다. &lt;br /&gt;&lt;br /&gt;1876년의 강화도 조약에 의한 개항으로 서양의 문물과 화장품, 일본 화장품 등이 유입되었으며, 신여성들 사이에서는 퐁파두르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퐁파두르 스타일이란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스타일로 프랑스 복식의 완성기인 1750년에서 1760년대의 프랑스 여성의 전형적인 로코코 방식의 스타일을 말한다. 또한 한류의 원조, 전설의 무희라고 불리는 최승희는 단발머리를 시도하여 단발머리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이 단발 보브컷은 신여성의 상징이었으며, 이전과는 다른 여성의 주체적인 사상을 나타내는 하나의 큰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는 국외의 유학생과 신여성들이 유행을 주도하였으며, 이숙종의 높은 머리(다카 머리)와 김활란과 최승희의 단발머리가 유행하였다. 1922년대에 들어서는 흰 피부를 위한 '박가분'이 출시되기도 하였으나, 납 성분으로 인해 납중독 부작용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이 후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서가분'이라는 화장품이 재출시되었다. 1933년에 화신백화점 내에 오엽주의 미용실이 개업했으며, 한국 최초의 파마머리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핀컬 파마와 숙발이라는 파마가 등장하여 유행하기도 하였다. 오엽주는 영화배우를 지망하다가 방향을 틀어 미용으로 관심을 돌렸으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가지 미용 스타일을 배워온 뒤 화신백화점 내에 미용업을 시작하였다. 화려한 옷차림과 하이힐, 독보적인 스타일로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가는 곳마다 화려함을 남겨 장안의 화제가 될 만큼 당시 미용과 스타일로서는 여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여파로 1937년에 최초의 파마머리를 선보였으며, 전기로 머리를 지진다 하여 '전발'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가격은 5원으로 금가락지 하나의 가격이었으나 부유층 여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파마머리는 여성들에게 유행의 대상이었으며, 오엽주는 한국 미용에 한 획을 그었다 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오엽주의 파마머리와 함께 유행했던 스타일은 한국 여성들의 의식구조를 바꿔놓을 정도로 획기적이었다. 또한, 현대무용가 최승희가 선두 주자였던 단발 보브컷은 조선 시대의 고정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탈피하는 시도였다. 오엽주의 미용실은 유명세를 치르며 많은 외국 영화배우를 모방한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 파마머리가 금지되었었으나 광복 이후 파마머리와 단발머리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일제 화장품들은 자취를 감추고 미국의 미용, 스타일링 방식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는 퍼머넌트 웨이브, 세팅, 아이롱으로 멋을 내는 스타일이 유행하였으며 1948년 10월에는 제1회 미용사 자격시험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미용사 자격시험이 신설되고 한국미용의 전문적인 과정이 신설되었으나 이후 국내 화장품이 생산되었으나 원료 부족 등으로 인해 일반인들의 구입이 어려워졌다. 이 시기 TV가 들어오게 되며 서양 매체를 접한 한국인들은 서양의 헤어스타일을 많이 따라 하기 시작했으며, 파마머리의 경우 단순한 웨이브가 아니라 단발 보브컷의 스타일에서 파생된 스타일의 종류가 상당히 많았다. 이후 국내 화장품이 생산되었으나 원료 부족 등으로 인해 일반인들의 구입이 어려워졌다. 6.25 전쟁 이후 1950년대에는 외국 기술이 도입되면서 화장품 산업이 성숙기를 맞이하였다. 1950년대에는 오드리 헵번의 짧은 머리 스타일과 세실 커트(Cecile cut)가 유행하였다. 그리고 권정희 선생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정화 미용 고등기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전문적으로 미용 기술을 가르치는 기관도 생겨났다. 정화 고등기술학교는 현재 정화예술대학으로 이름을 변경하였으며 사립 전공대학이다. 1951년에 한국 근대 미용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권정희 여사가 전문 미용인 양성과 미용산업계를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갈 직업인 육성을 위해 정화 미용 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2008년 정화예술대학으로 개편되었고 2015년 정화예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이처럼 미용에 대한 관심도가 급진적으로 올라갔으며, 전문적인 미용인을 육성시키고자 하였다. 이후 한국 전쟁을 겪은 여성들은 박탈당했던 아름다움을 되찾고,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펼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흰 피부를 향한 선호도가 높아져 선크림과 깨끗한 피부표현을 위한 화장품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1950년대에 화장과 미용에 대해 지식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할리우드 영화가 기본 교과서가 되었다. 영화산업의 호황으로 외국 배우의 스타일을 모방하였으며 이때가 한국의 미용, 화장품 메이크업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다. 매체의 발달로 길고 얇은 아치형 눈썹, 흰 피부, 새빨간 입술로 서구적인 메이크업을 따라 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용 관련 학교와 학원이 등장하였으며, 다양한 기술 및 제품으로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였다.&lt;/p&gt;</description>
      <category>미용학</category>
      <author>오로라공주</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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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9 Oct 2022 00:28:3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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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미용의 역사(1)</title>
      <link>https://monde-beauty.tistory.com/3</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태초에 인간이 생기고,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할 때부터 꾸밈은 우리와 함께 해왔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우두머리로서 인정받기 위해 또는 이성에게 구애하기 위해,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여러 가지 이유로서 인간의 삶과 함께 해왔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것을 현대에서는 '미용'이라 지칭하며 세분화 되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미용의 종류에는 피부미용, 네일, 헤어(이발), 메이크업이 있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공중위생관리법 제2조 5항에 의하면 &amp;lsquo;미용업이란 손님의 얼굴, 머리, 피부 등에 손질하여 손님의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영업&amp;rsquo;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lt;span&gt;또한 미용업소란 미용사가 미용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춘 사업장을 의미하며, 미용 행위 다시 말해 미용 업무에 대해서는 공중위생법 시행규칙 제28조에 &amp;lsquo;미용사는 퍼머넌트, 머리카락 자르기, 머리카락 모양내기, 두피 손질, 머리카락 염색, 머리 감기, 손톱 손질 및 화장,&lt;span&gt;&amp;nbsp;피부미용&lt;/span&gt;&lt;/span&gt;(의료 기구나 의약품을 사용하지 아니하는 순수한 피부미용을 의미), 얼굴 손질 및 화장을 그 업무로 한다.&amp;rsquo;라고 규정되어 있다.&lt;br /&gt;즉 미용인은 고객의 모발, 피부, 건강 상태를 직시하고 있어야 하며, 그에 대한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하므로 기본적인 미적 감각과 센스가 요구된다. 결론적으로는 고객의 요구에 따라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여 감동을 줄 수 있는 결과를 낼 줄 알아야 한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우리나라의 미용은 청결하고 흰 피부를 선호하였으며 신분에 따라 머리 형태와 화장법에 차이가 있었으며 단정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을 치장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amp;lsquo;단군신화&amp;rsquo;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놓도록 백성에게 지시한 것으로 보아 상투 형태로 변해갔다고 한다. 곰과 호랑이의 건국 신화를 바탕으로 미루어보아 희고 건강한 피부를 위해 쑥과 마늘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만주 지방에서는 라드(돼지기름)를 사용하여 동상을 예방하였으며, 말갈인은 오줌으로 세수하여 흰 피부를 가꿨다고 한다. 또한 유물로 뼈 비녀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lt;span&gt; 쪽 찐 머리&lt;/span&gt;가 행해짐을 알 수 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이후 삼국시대와 신라시대로 들어 미용에 대한 부분이 더욱 발전하고 세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고구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은 국가로서, 불교 의식에 따른 목욕과 향이 사용되었으며 머리의 형태로 귀천의 차이를 나타냈다.&amp;nbsp; 통일왕조였던 당나라의 역사 문서인 당서에 따르면 고구려 여성들은 신분에 따라 가발을 사용하여 다양한 머리 형태로 신분을 표현, 과시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무녀와 악공이 곤지(볼 화장)를 행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또한 쌍영총 벽화 등 출토된 벽화에서 화장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lt;br /&gt;&amp;nbsp;하지만, 백제 미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일본의 화한 삼도 재회에서 백제로부터 화장품 제조 기술과 화장법을 배웠다는 기록을 볼 수 있으며, 중국 문헌에서는 백제인의 화장은 '얼굴에는 분을 바르지만, 입술에는 연지를 바르지 않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북방의 유목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민 집단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나라로 마한의 전통을 계승하여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찐 머리와 머리를 둘로 갈라 상투를 두 개로 틀어 올린 쌍상투 머리,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리는 댕기 머리를 했음을 알 수 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신라는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영혼이 머문다' 즉, 영육일치 사상의 영향으로 남녀 모두 몸을 청결하게 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가체를 사용한 장발 기술이 우수했으며, 머리를 가꾸는 것에 높은 관심이 발달하여&lt;span&gt;&amp;nbsp;머릿기름&lt;/span&gt;을 제조하였다. 또한 귀걸이, 가락지 등 장신구를 사용하여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군인, 관리를 양성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던 &lt;span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73a3c;&quot;&gt;화랑은 아름다운 청년을 모집하여 내면의 수련뿐 아니라 외면을 가꾸는 것 역시 중요하게 보았으므로 단순한 수련 단체를 넘어 현대로 치면 나라를 대표하는&lt;span&gt;&amp;nbsp;홍보대사&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background-color: #ffffff; color: #373a3c;&quot;&gt;에 해당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lt;/span&gt;불교의 영향으로 목욕이 대중화되었으며 향유가 발달하였다.&lt;br /&gt;&amp;nbsp; 통일신라시대로 넘어와, 삼국의 문화를 융합하고 신라의 전통적 문화를 계승하여 머리모양과 장신구들이 다양해지고 매우 화려해졌다. 또한 당나라 문화를 중심으로 국제 문화 조류에 직접 참가하여 더욱 세련된 문화로 발전해나갔다. 당나라에서 수입해온 빗, 비녀 등 여러 가지 머리 장신구를 사용하였고,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남성들이 단발머리를 하기도 하였으며 여성들은 가발을 사용하는&lt;span&gt; 얹은머리&lt;/span&gt;를 즐겨하였다. 이는 훗날 고려와 조선의 가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 고려 시대에는 통일신라의 문화를 전승하였으며 신분 및 나이에 따라 달리 치장하였다. 여성들은 댕기 머리와 가체를 사용한 머리를 즐겨하였으며 남성의 경우&lt;span&gt; 머리를 틀어 올려 한 곳으로 모아놓는 상투의 형태&lt;/span&gt;를 주로 하였으나, 원나라의 섭정 때에는 변발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는 화장이 신분과 사회적 역할에 따라 나뉘는 등 이원화가 시작되어 기생들은 분대 화장이라 불리는 진한 화장을 여염집 부인들은 비 분대 화장을 하였다. 화장품을 보관하는 용기가 발전되어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제작되어 견고해졌으며 향수병, 분합 등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고려 말에는 숯, 재, 옻나무 등 검은 빛이 나는 가루들로 백모를 커버하기도 하였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고려와 다르게 조선은 유교 사상을 받아들여 남존여비의 사상으로 인해 고려 시대에 비해 검소하고 간략하였으나 명나라의 영향으로 점점 가체가 높아지고 화려해졌다. 이로 인해 영조 32년 가체를 무겁게 쓴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목이 부러져 사망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가체 금지령을 내려 족두리를 쓴 형태의 쪽 찐 머리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간소한 형태의 족두리였으나 신분과 재산에 따라 족두리는 자개, 가죽 등을 덧대어 더욱 화려해졌다. 그리고 화장의 이원화가 뚜렷해지고 화장이 세분되었으며, 궁중 여인들의 화장과 제품을 생산하는 전문 기관인 보염서도 생겨났다. 규합총서(순조 9년) 부녀자들의 생활지침서에는 여인들이 지녀야 할 덕목, 요리법, 염색법, 화장법 등을 수록한 목판본이 편찬되었으며 화장품 제조 방법 및 화장 방법이 수록되기도 하였다.&lt;/p&gt;</description>
      <category>미용학</category>
      <author>오로라공주</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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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7 Oct 2022 04:40:5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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